역사
++제3절 통일신라시대
작성일
2025-07-26
조회
11
제 3절 통일신라시대
통일 이후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은 9주5소경(九州五小京)으로 나누어졌다. 이것은 문무왕(文武王) 때부터 신문왕(神文王) 7년(서기 687)까지 삼국을 통일한 새 국가에 대한 정비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진 지방행정구역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서기 757)에는 모든 지방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9주 5소경의 주(州)는 지금의 도(道)와 같이 대단위 구역이고 주(州) 밑에 군(郡), 군 밑에 현(縣)을 두었는데 주는 총관(摠管 : 오늘날 도지사 격인데 후에는 都督이라고 고침), 군에는 태수(太守=郡守), 현에는 현령(縣令)이 장(長)이었다. 그리고 마을에는 촌주(村主)가 있어서 마을의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마을 중에는 향(鄕), 부곡(部曲), 처(處)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포로 혹은 반역죄인의 가족 등 천민계급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니면 호수(戶數)와 인구가 적으면서 현(縣)이나 촌(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촌(山村)이었다.
그리고 소경(小京)을 다스리는 행정책임자는 사신(仕臣), 혹은 사대(仕大)라고 하였다. 9주 5소경 중에서 고성지방과 관계있는 것은 명주(溟州)인데 당시의 강원도는 삭주(朔州)와 명주(溟州)로 구획되었고 삭주는 대체로 영서지방, 명주는 영동지방이었다.

삭주는 지금의 철원(鐵原), 이천(伊川), 김화(金化) 등으로 철령 이서지방은 이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 대신 함경남도의 안변(安邊)과 덕원(德源), 그리고 경기도의 가평(加平), 충북의 제천(堤川), 경북의 영주(榮州)가 들어 있었으니 북은 덕원(德源)에서 영흥만을 끼고 내려와 철령을 넘어서 영서지방 일대를 거쳐서 죽령을 다시 넘어 경북 영주(榮州)와 봉화(奉化)에 이르는 긴 주가 삭주(朔州)였다. 삭주에는 북원경(北原京)이라는 소경이 있었는데 지금의 원주(原州)이다. 그리고 삭주의 치소(治所), 즉 총관 소재지는 춘천이었는데 관할 군(郡)은 12군이며 군 밑에 있는 현(縣)은 27현이었다.
고성지방이 포함된 명주(溟州)는 강원도 동해안이 대부분인데 강원도 영서지방으로 볼 수 있는 영월(寧越),정선(旌善), 평창(平昌)이 명주에 포함되어 있으며 경북의 울진(蔚珍), 영양(英陽), 청송(靑松), 영덕(盈德)이 대체로 이에 속해 있었고 주의 치소는 강릉(江陵)이었다.그리고 명주는 9군 25현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오늘날 강원도가 영동지방에 동해출장소를 주문진에 설치하여 실제 영서지방과 분리하여 관할하고 있는 것을 볼 때 1200년 전인 옛날 교통이 불편하였을 때의 사정으로 보아 당연 하였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성지방은 군사적으로 자못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삭주(朔州)와 명주(溟州)가 모두 국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 군사관계를 살펴보면 군사배치표에 6정(停)과 10정(停)이 있는데 6정은 통일 후 10정이 설치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지방에는 10정과 5주서(五州誓)와 삼변수당(三邊守幢)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삭주와 명주와 한산(漢山)에는 세가지 부대가 빠짐없이 있었다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것으로 이 지방의 군사적인 중요성이 입증되기도 한다.
통일 이후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은 9주5소경(九州五小京)으로 나누어졌다. 이것은 문무왕(文武王) 때부터 신문왕(神文王) 7년(서기 687)까지 삼국을 통일한 새 국가에 대한 정비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진 지방행정구역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서기 757)에는 모든 지방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9주 5소경의 주(州)는 지금의 도(道)와 같이 대단위 구역이고 주(州) 밑에 군(郡), 군 밑에 현(縣)을 두었는데 주는 총관(摠管 : 오늘날 도지사 격인데 후에는 都督이라고 고침), 군에는 태수(太守=郡守), 현에는 현령(縣令)이 장(長)이었다. 그리고 마을에는 촌주(村主)가 있어서 마을의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마을 중에는 향(鄕), 부곡(部曲), 처(處)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포로 혹은 반역죄인의 가족 등 천민계급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니면 호수(戶數)와 인구가 적으면서 현(縣)이나 촌(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촌(山村)이었다.
그리고 소경(小京)을 다스리는 행정책임자는 사신(仕臣), 혹은 사대(仕大)라고 하였다. 9주 5소경 중에서 고성지방과 관계있는 것은 명주(溟州)인데 당시의 강원도는 삭주(朔州)와 명주(溟州)로 구획되었고 삭주는 대체로 영서지방, 명주는 영동지방이었다.

삭주는 지금의 철원(鐵原), 이천(伊川), 김화(金化) 등으로 철령 이서지방은 이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 대신 함경남도의 안변(安邊)과 덕원(德源), 그리고 경기도의 가평(加平), 충북의 제천(堤川), 경북의 영주(榮州)가 들어 있었으니 북은 덕원(德源)에서 영흥만을 끼고 내려와 철령을 넘어서 영서지방 일대를 거쳐서 죽령을 다시 넘어 경북 영주(榮州)와 봉화(奉化)에 이르는 긴 주가 삭주(朔州)였다. 삭주에는 북원경(北原京)이라는 소경이 있었는데 지금의 원주(原州)이다. 그리고 삭주의 치소(治所), 즉 총관 소재지는 춘천이었는데 관할 군(郡)은 12군이며 군 밑에 있는 현(縣)은 27현이었다.
고성지방이 포함된 명주(溟州)는 강원도 동해안이 대부분인데 강원도 영서지방으로 볼 수 있는 영월(寧越),정선(旌善), 평창(平昌)이 명주에 포함되어 있으며 경북의 울진(蔚珍), 영양(英陽), 청송(靑松), 영덕(盈德)이 대체로 이에 속해 있었고 주의 치소는 강릉(江陵)이었다.그리고 명주는 9군 25현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오늘날 강원도가 영동지방에 동해출장소를 주문진에 설치하여 실제 영서지방과 분리하여 관할하고 있는 것을 볼 때 1200년 전인 옛날 교통이 불편하였을 때의 사정으로 보아 당연 하였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성지방은 군사적으로 자못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삭주(朔州)와 명주(溟州)가 모두 국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 군사관계를 살펴보면 군사배치표에 6정(停)과 10정(停)이 있는데 6정은 통일 후 10정이 설치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지방에는 10정과 5주서(五州誓)와 삼변수당(三邊守幢)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삭주와 명주와 한산(漢山)에는 세가지 부대가 빠짐없이 있었다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것으로 이 지방의 군사적인 중요성이 입증되기도 한다.
